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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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29)
2014년 04월 01일 12시 49분  조회:2840  추천:1  작성자: 김송죽
 

29.

한족총련합회는 같은 민족, 같은 동포건만 어느덧 적대관계로 변해버린 진영으로부터 점점 심하게 가해지는 위협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달리는 막아낼 방법이 없어서 끝내는 대외적인 조직공작과 중학기성공작을 잠시 중지하고 지방안전과 인신안전에다 신경을 쓰기로했다.

한편 리립삼로선에 따라서 행하여진 <<좌>>경모험주의적인 5월폭동의 후과로 말미암아 혁명자들은 만주땅에서 극히 곤난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애비가 죽자 등단한 새 동북군벌 장학량(張學良)은 6월에 중한공산당취체법(中韓共産黨取締法)을 제정하여 공산당사람들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이런때에 한족총련합회에서는 범상치 않은 한가지 일이 발생했다.

<<됐소! 됐다니까!>>

남대관(南大觀)이 밑도 끝도 없는 이런 소리를 웨쳐댔다.

<<무슨 소리요?>>

<<뭐가 됐다는거요?>>

여럿이 그의 기분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물었다.

그랬더니 남대관은 동북군벌 장학량이 중한공산당취체법을 내놓지 않았느냐. 그러한즉 바로 죽어 원혼이 된 김장군의 원쑤를 갚을때가 돌아왔다면서 이 기회에 공산주의자토벌에 호응해나서자는것이였다.

<<아니, 저 사람이 미치질않았나. 언감생심 그따위 소리를 줴치다니?>>

<<8로>>들은 저으니 놀라면서 그에게 힐난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함에도 남대관은 한족총련합회가 자기의 수령을 잃은것도, 이같은 궁지에 빠진것도 다가 공산당때문이 아니냐 하면서 견결히 주장해나섰다.

<<김장군은 그러지를 않았네. 그토록 험악한 비방과 공격을 받으면서도 그렇게는 나서지를 않았단말이네. 우리는 나라가 독립이 될 때까지는 주의를 불문하고 어떻게든 뭉치여 싸워야 할게 아닌가? 이 사람아!>>

한족총련합회를 힘들게 끌고있는 권화산로인이 감정에 사로잡혀 대사를 그르치지 말라고 그를 일깨워주었다.

그렇건만도 남대관은 돌아간 장군은 남을 너무관용해서 결국은 하나밖게없는 보귀한 생명마저 잃어버린게 아니냐고 반박했다. 그리고는 여지껏 장군을 경모해오고 뒷따른 자기가 이같은 절호의 기회에 복수하러 나서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이 서겠느냐면서 자기의 주장과 행동은 필연적이고도 정당한것이라고 변호했다.

<<8로>>를 비롯한 한족총련합회의 많은 간부들은 독립군은 일제와 항쟁코저 창설된것이지 결코 공산당까지 원쑤로 보고 생겨난것은 아니라했다.

<<우리는 여기에 있는 망나니같은 종파녀석들하고 원쑤간이 되었을 뿐 아직 다른 공산주의자들하고는 척진일도 없네. 더구나 중국공산당하고는 전혀 거래한적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네들이 토벌하는 일에 우리가 관여를 하다니... 그렇게 하면 그것이 제 스스로 앙화를 뒤집어쓰는걸루 되지 않겠는가. 무모한짓이네. 무모한 짓.>.

이러면서 독실한 대종교도늙은이 정해식도 그보고 독립군이 해가 될 그따위 생각은 싹싹 걷어장지라했다.

그런데 무정부주의자들은 저들의 흑색동맹 성원인 남대관은 의기있는 장부라면서 바싹 지지해나섰다. 공산주의에 대해 특별한 적의를 품어온 그들은 현재의 처경, 특히는 김장군이 조난당한것을 리유로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면서 반공에 열을 올렸다. 그래서 무정부주의자아닌 적잖은 대종교도들은 변론을 하다가 그만 맥이 진하여 그만두고말았다.

이 일로 하여 분쟁이 심해지면 시초에는 화목했던 신민부가 군정파와 민정파로 갈라지여 나중에는 세력약화를 초래하듯이 리로운 점은 없으리라는것을 생각하고 서로가격정을 삭이였다.

대종교의 제2인물로서 난국을 타개해오던 정신은 침묵으로써 창궐해지는 무정부주의에 대항했다.

그리하여 무정부주의자들은 더 제멋대로 하게 되었다. 남대관과 백남준(白南俊)을 골간으로 하는 한패의 <<토공대>>가 어느날 비밀리에 만주 <<공비토벌대장>>인 길림성 군법처장 왕계(王啓)를 찾아떠났다. 끝내 동족을 살해하는 죄악의 길을 걷고말았다.

이런 때에 길림에서는 고령자 땅의 지주로부터 학교기지의 임대차계약을 맺자면서 대리인을 보내왔다.

한족총련합회는 활동자금이 고갈되고 형세부득한 사정에서 백야장군이 조난당한 일과 현재에 처한 정황을 실토정하고는 이제 사태수습이 되는대로 사람을 길림에 보내겠노라고 말해서 그 대리인을 돌려보냈다.

약 3일이 지난 6월하순의 어느날, 한족총련합회가 재정난에 빠져 한창 곤경을 겪고있 때 뜻밖에 기쁜소식이 전해왔다. 재중조선무정부주의자련맹(在中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으로부터 북만주에 있는 무정부주의자 리을규에게 무정부주의자대표회의에 참석하라는 초청장이 왔는데 그 회의목적인즉 국내에 있는 동지로부터 거액의 운동자금을 갖고왔으니 그것을 나누기 위한 토론을 하자는 것이였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있는가! 이 소식은 그야말로 한족총련합회를 사지에서 구출하는 복음과도 같았다. 그래서 모두들 희망과 환희에 잠기게 되었다.

이쪽에서는 리을규와 김종진이 대표로 되어 북경을 향해 인차떠났다.

모두들 기쁨을 안고 돌아오라면서 그네들을 바랬다.

그들이 떠나가자 련달아서 7월에 한국독립당창립대회가 있느니 대표를 보내라는 통지가 왔다. 이것은 북만주에서 활동하고있는 민족운동자의 대동단결을 위해서는 아주필요했다. 이번 당창립에 선두나선 사람들은 전번 <<촉성회>>가 해체된 후에 생겨난 생육사(生育社)의 골간들인 홍진, 리청천, 리장녕, 신숙 등이였다. 한족총련합회에서는 정신과 황학수, 민무외에 길림에 간 남대관을 대표로 참가시켰다.

이번의 한국독립당창건에 참여한 중심인물들 가운데는 무관학교의 출신이 많으며 신분적으로 보아 대부분이 량반과 지주출신들이였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모두가 대종교도들이였다.

회의는 중동로 동부선의 위하현(葦河縣) 현성에 위치한 김광택(金光澤)의 집에서 열리였는바 한국독립당에서는 중앙에 중앙당부를 두고 고문, 위원장과 부위원장, 군사부위원, 조직부위원, 총무위원, 조직보위원, 조사부위원, 민정부위원, 훈련부위원 등 7개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는 지(현)당부와 구당부를 두었다.

한국독립당은 한족총련합회의 무력을 모체로 장차 자기의 당군(黨軍)을 창설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쪽에서는 당건설기간인 7월중순에 돈가지러갔던 두사람중에 김종진 혼자 빈손으로 돌아오고말았다. 그래서 모두들 기다림속에서 한껏 부풀었던 기대가 삽시에 무너지고말았다.

일은 이러했다. 조선에서 신현상(申鉉商)이란분과 미곡상(米穀商) 최석영(崔錫營)이란 분이 운동자금 8만원을 만들었는데 먼저 호서은행(湖西銀行)에서 절반을 꺼내가지고왔다. 그래서 그 거액을 실속있게 나누기 위해서 각지의 형편에 따르는 계획안들을 내놓고 한창 회의를 하던중 어느날 새벽 대표들이 들어있는 합숙이 돌연히 중국경찰을 앞세운 일본령사관의 경찰들이 달려들어 돈을 가지고 온 두사람과 함께 여럿을 함께 구축했던 것이다. 중국당국과 교섭하고 강렬한 항의를 들이대여 이쪽의 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플려나왔으나 신씨와 최씨 두사람음 끝내 잡혀가고 돈도 전부 압수당하고말았다.

일본경찰당국은 촉각이 과연 예민했다. 그자들은 그 두사람이 국내의 호서은행에서 그렇게 거액의 돈을 꺼내가지고 자취를 감추니 이 돈은 틀림없이 국외로 빠져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이리라 짐작하고 얼른 추적조사를 시작했다. 그자들은 조선안에서 일어난 강도단이 북경에 잠입했다고 사칭(詐稱)하고는 그 체포를 중국경찰당국에 이뢰하는 한편 경찰을 매수하여 앞잡이로 내세워 그렇게 감쪽같이 수색을 해냈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이런 돌발적인 사건은 민족독립운동에 한차례 큰 타격으로되였다. 하는수없이 리을규는 자금을 얼마라도 구해보려고 관내로 나가고 김종진은 려비조차 떨어져 동냥하면서 간신히 되돌아왔다.

이제는 리을규한테나 희망을 거는수밖에 없었다.

한데 설상가상이라할가 또 다른 타격이 들이닥칠줄이야. 리을규가 김종진과 갈라진 10일만에 북경을 떠나 천진에 들렸다가 거기서 밤에 영국기선 태고양행(太古洋行)배를 타고 천지부두를 출발하려는 찰나에 경찰의 손에 붙잡혔다는 전보가 북경에서 날아왔다. 그래서 그 한가닥의 희망마저 이젠 산산히 부서지고말았다.

갈수록 수미산이였다. 한족총련합회는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지탱되는거나 다름없는 판인데 주력군하나가 그렇게 되고보니 내부는 허전해졌다.

이런 절망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모지름을 쓰던 김종진은 마침내 한가지 수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즉 경제난을 해결못하더라도 관내에 있는 무정부주의자들을 대량 집중시킴으로써 감소된 력량을 보충하고 강화하여 진영을 사수해보자는것이였다. 그는 북경에 있는 자기가 가장 경모해온 우당(又堂)선생한테 현재의 처경을 상세히 알리고 급박하니 동지들을 모아서 북만주로 속히 와달라는 간곡한 부탁편지를 했다.

그랬더니 10월말에 과연 선발대로 15명이 북만주로 들어왔는데 그들중에는 지혜롭게 몸에 10여자루의 권총과 탄알을 숨겨갖고 온 녀성 둘도 있었다.

모두들 감탄하면서 그들을 반기였다.

아주 낯선 고장이고 이제 이루다 형언키 어려운 곤난들이 있으리라는것을 미리 각오하고 온 그네들은 로고를 풀기바쁘게 중동로일대, 그중에서도 산시, 해림, 고령자, 석두하자 등지의 소학교에 배치되여 교편을 잡았다. 말이 교원이지 기실은 지방공작과 함께 무정부주의리념을 고취할 목적으로 파견된 간부들이였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한편 긴긴 결울 한철은 강연대를 조직하거나 소형의 공연대를 조직해서 순회하면서 열심히 선전하여 동요되고있던 한족총련합회에로 다시돌아서게끔 선전사업을 벌리였다. 그리하여 한족총련합회는 생기가 다시금 피여나게 되었다.

1한편 1931년 3월에 한국독립당의 리청천, 신숙, 남대관, 권수정 등은 한국독립당관할 36개구역의 재만조선인들에 대한 보호와 함께 무장독립혁명을 수행할 목적으로 아성현 대길하(大吉河)에서 마침내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조직했다. 이 조직은 한국독립당의 령도를 받았다.

한국독립군은 총사령 리청천의 령도밑에 의용군, 암살대, 결사대, 별동대, 헌병대, 선전대 등을 두었다. 그러면서 이와는 별도로 한국독립당은 자기 당군의 발전을 돕기 위해서 당내에 구국군후원회(救國軍後援會)를 조직해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과연 김좌진장군이 생전에 구상했던 그대로였다.

헌데 한족총련합회에서는 이처럼 독립운동진영이 묶어져 동산재기의 기운이 펴지고있을 때 공교롭게도 무정부주의자중의 중견인 한사람이 북만주의 풍한에 결핵병이 도졌다. 부득불 기후가 좋은 남방으로 되돌아가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서 5월중순에 한사람이 그를 배동하다보니 중견 둘이나 줄어들고말았다. 그들은 가다가 미행하는 왜놈경찰의 끄나블을 저격사살하고 경계선을 넘었다.

이일로해서 일본경찰당국은 트집잡고 한족총련합회를 수색파괴하려들었다. 한국총련합회에서는 그것이 모략중상이라고 견결히 맛서서 위험을 겨우 면했다.

하지만 모두가 놀랜 가슴이였다. 보아하니 새해인 1931년도는 국세가 더 긴장해지면서 어쩐지 한족총련합회의 머리우에 헤쳐버리기 어려운 비운이 내리덮는것만같았다.

이해를 과연 어떻게 넘길지?

한족총련합회에서 제2의 비극이 일어날 징조가 나타나고있었다. 백야장군이 조난당하자 한족총련합회는 석하(石河)에서 림시총회를 서둘러 열고 권화산을 주석으로초대했었다. 그렇지만 실권은 무정부주의자들이 다 잡고있는거나 다름없어서 내부는 새로운 반목과 분화가 조성되고있었던 것이다.

기미년전후부터 동만과 북만 민족주의진영의 정신적바탕은 대종교였다. 식견과 수완이 있는 대종교도인 정신은 이 진영에서 실제상 김좌진다음으로 가는 인물이였는데 그는 백야가 무정부주의자들과 제휴하는것을 처음부터 내심으로는 동의하지 않으면서 묵묵히 따랐던 것이다. 그러던 그는 백야장군이 죽자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은근히 화살을 겨누었다. 그러다가 얼마전에 화전현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취원창(聚源廠)부근에서 주구의 손에 불행히 피살되였다.

한편 총잘쏘고 담대하여 김장군의 총애를 받아왔던 리백호(李白虎)가 박래춘(朴來春), 리익화(李益和), 백운봉(白雲峰), 류희춘(劉喜春) 등과 작당하여 무정부주의자를 극도로 증오하면서 지어 숭고한 목적을 지닌 다른 혁명자들에게마저 만행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지난 4월, 홍진이 주하현에 가서 한밤에 동포의 집에다 김규식, 리청천, 최악, 리강훈 등을 모여놓고 회의를 하고있을 때 그 악당 5명중 일원인 류희춘이 뛰여들어 <<기호놈들은 다 죽인다>>면서 최악과 리청천을 구타했고 김규식은 끌어내다 생식기를 뽑아 극히 잔인하게 참살했다.

김규식은 일찍이 의병대장인 허위의 막하에서 의병장으로 용맹을 떨치다가 씨비리와 만주벌에서 백야와 생사를 같이해온 독립군장령이다. 이런 유공자가 독립혁명을 인도할 식견이나 수완이란 전혀없으면서 자유방종만 가득자라서 광기를 부리는 악한의 손에 귀한 목숨을 잃은것이다.

통탄할 일 아닌가!

사회형편도 험악해갔다.

7월 1일, 길림성의 만보현에서 논의 개간문제를 가지고 조선농민과 중국농민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그런데 일본경찰이 조선농민을 보호한다는 명의로 중간에 끼여들어 중국농민에 향해 총을 쏘고 협박하고 많은 사람을 체포하여 뚜드려패놓았다. 이것을 <<만보산사건>>이라하는데 소문이 재빨리 퍼져서 말썽이 많았는바 조선사람은 어느덧 중국사람이 증오하는 대상으로 지목되였다. <<만보산사건>>으로하여 북만에 살면서 여지껏 큰 모순없이 지냈던 조선사람과 중국사람지간에도 반목이 생기면서 사이가 긴장해졌다.

어느날 산시역전 호로군중사반장 손상거가 돌아오는 김기철로인을 보자 단도직입적으로 따져물었다.

<<로인님! 한가지 물읍시다. 조선사람은 왜 일본편에 붙습니까?>>

<<그건 웬 소리요? 누가 그러오?>>

<<만보산에서 불상사가 일어난걸 그래 모릅니까. 남의 나라에 들어와 살면서 땅 한뙈기를 다뤄도 미안해해야 할 신세에 외려 일본놈믿고 제가 주인행세를 하니 그게 뭠니까? 정말 량심없습니다.>>

<<손반장까지 그렇게 생각하면야 해석하기조차 어렵군. 한가지 물어보기요. 손반장은 이곳에서 우리네 사람이 왜놈세력믿고 농사짓는걸 보았소?>>

손상거는 말문이 막혔다.

김기철로인은 그한테 농사군끼리 간혹 분쟁이 있기는 마련인데 일본경찰이 왜 중간에 끼여들었겠는가? 그건 조선사람을 보호해주는척 하면서 사실은 리간질을 시킨거라고 그를 깨우쳐주었다....

산시마을 정미소 건너 동켠의 공지에는 지난겨울 숱한 로동력이 동원해서 먼산에 가 찍어온 목재들이 커다란 더미를 이룬채 그대로 있었다. 그것은 이 마을에다 한족총련합회의 건물과 학교를 지을 재목이였다. 고령자에도 중학교지을 목재를 해마다 무져놓은 더미가 그대로 있었다.

(참, 어느때가야 저것들을 다 쓰고 집이 될지 원.>>

김기철로인은 기대와 다르게 전도가 점점 암담해지는 것 같아서 절로 한숨이 나갔다.

8월중순의 어느날, 석두하자에 있는 김동진의 집에서 북만주의 조선무정부주의자련맹의 선봉이고 한족총련합회의 간부차장인 리준근(李俊根)과 김야운(金野雲)이 돌연히 저격사살을 당했다.

그리고 며칠지나지 않아서는 김종진마저도 해림역근처에 있는 조영원(趙永元)의 집으로 유인랍치되였으니 때는 바로 8월 24일(음력 7월 11일) 금요일이였다.

하루지나 26일에 그의 잘리운 머리가 신안진거리에 걸리였다. 그런것을 독립군들이 밤에 신안진에 잠입하여 어느 집의 나무가리에 불을 질러 혼란한 틈을 타 훔쳐내다가 논물고에 감추었다. 그랬다가 비밀리에 조용히 장(葬)을 지내고 파묻었으니 그때 김종진의 나이는 31살이였다.

<<동아일보>> 9월 11일부는 김종진의 피살에 대해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최근 한족총련합회 군사부 위원장으로 활동중이던 시야 김종진씨는 지난 8월 26일 중국 중동선 해림역부근에서 총살을 당하였다. 가해자는 박래춘(朴來春), 리백호(李白虎), 리익화(李益和) 등 3명으로 주의 충돌인듯하다.>>

 

그리고 지난해에 백야 김좌진장군을 살해한 박상실이 아성현호로군총사령부(阿城縣護路軍總司令部)의 손에 체포되여 그곳 회심처(會心處)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형을 집행코저 봉천(심양)으로 압송되였다는 기사도 함께 실음과 동시에 독립군모험대장 고강산역시 체포되였다는 소식도 보도되였다.

참혹한 세월이였다!

핵심인물들이 련이어 암살, 체포되자 대종교적 민족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자들과 공공연히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이를 계기로 한족총련합회에서 탈퇴하여 따로 한족자치련합회를 내왔다. 이리하여 김좌진이 무정부주의리념을 수용하여 설립하였던 한족총련합회는 개화기에 종막을 내리고만 것이다.

새로 설립된 한족자치련합회는 한국독립당의 령도를 받는 유일한 기관이였다.

한편 유일당 결성과 통합운동은 우여곡절끝에 남만주에서는 <<국민부>>와 그의 리념적 유일당인 <<조선혁명당>>, 그리고 그의 소속 독립군인 <<조선혁명군>>으로, 북만에서는 혁신의회를 거쳐서 <<한족총련합회>>와 그를 이은 <<한족자치련합회>> 및 그의 리념 당군인 <<한국독립당>>, <<한국독립군>>으로 개편됨으로 하여 두 개의 큰 세력으로 통합 정리되였다. 그리하여 남북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이들 당군의 주축으로 피어린 항전을 벌려 독립군 도미(掉尾)의 항일전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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